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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나의 가톨릭 이야기/[천주교] 가톨릭의 수호성인

[천주교 세례명] “죽어가면서도 용서한 선교사” 성 베드로 샤넬(Saint Peter Chanel)

by 1살 비오 2024.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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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들으시면서 읽는 것을 추천드리겠습니다^^↑

 

성인명(saint name) 성 베드로 샤넬(Saint Peter Chanel)
축일(Feast) 4월 28일(28 April)
성인 구분(Saint Type) 성인(Saint)
시복(Beatified) 1889년 11월 17일(17 November 1889)
시성(Canonized) 1954년 6월 12일(12 June 1954)
수호(Patronage)  
신분(Identity) 신부(priest), 선교사(missionary), 순교자(martyr)
활동지역(activity area)  
활동연도(activity year) 1803-1841년

 

 

성 베드로 샤넬(Saint Peter Chanel)는 1803년 7월 12일 프랑스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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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 Peter Chanel was born on July 12, 1803 in France, the son of a poor farmer. 

 

어려서부터 목동으로 일하던 그는 12살 무렵 한 교구 사제가 부모를 설득해 자신이 만든 작은 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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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worked as a shepherd from a young age, and when he was about 12 years old, a parish priest persuaded his parents to allow him to receive an education at a small school he had created. 

 

경건함과 총명함을 지녔던 그는 1817년 첫영성체를 하고 해외 선교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는 1827년 7월 15일 사제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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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man of piety and intelligence, he received his first Holy Communion in 1817 and began to take an interest in overseas missions. He was ordained a priest on July 15, 1827. 

 

그리고 그는 마리아 선교 수도회(The Society of Mary, Marists Fathers)에 입회한 후 5년 동안 신학교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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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joined the Society of Mary, Marists Fathers and served as a professor at the seminary for five years. 

 

그는 선교를 위해 구성한 소규모 팀에 참여하여 오세아니아의 폴리네시아(Polynesia)로 파견되었다. 그런데 당시 폴리네시아 여왕이 런던 선교회의 선교사이자 상인인 영국 영사의 반대를 두려워해 그들을 다른 섬에서 활동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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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participated in a small team formed for missionary work and was dispatched to Polynesia in Oceania. However, the Queen of Polynesia at the time feared opposition from the British Consul, a missionary and merchant of the London Mission, so she had them work on other islands. 

 

결국 그는 평수사 1명과 통역에 능통한 영국인 평신도와 함께 다른 섬에 정착하였다. 그는 5년 동안 생활했는데, 처음 두 해 동안은 큰 어려움 없이 선교 활동을 하며 일부 섬 주민들을 개종시키고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등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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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ntually, he settled on another island with a lay monk and a British layman skilled in interpretation. He stayed there for five years, and during the first two years he conducted missionary work without much difficulty and achieved some success, including converting some of the islanders and baptizing children. 

 

그리고 현지 언어를 배워 익히면서 점차 그곳 주민들의 신임을 얻어갔다. 하지만 그에 대한 주민들의 신뢰가 커지자 제사장을 겸하는 추장의 질투와 견제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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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as he learned the local language, he gradually gained the trust of the local residents. However, as the residents' trust in him grew, he came under jealousy and checks from the chief who also served as a priest. 

 

게다가 추장의 아들과 다른 젊은이들에게 세례를 주려고 하자 추장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그와 함께 활동했던 동료 수도자들은 3년 만에 섬을 떠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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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eover, when he attempted to baptize the chief's son and other young people, he encountered strong opposition from the chief, and his fellow monks left the island after three years. 

 

하지만 그는 끝까지 남아 버티다가 1841년 4월 28일 추장이 보낸 사람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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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ever, he remained until the end and was murdered by men sent by the chief on April 28, 1841. 

 

그는 죽어가면서도 모두를 용서하여 섬 주민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가 사망한 후 그에 대한 섬 주민들의 사랑과 존경은 개종의 물결로 이어졌고, 1843년에 섬 주민 모두 가톨릭 신자가 되는 열매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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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n as he was dying, he forgave everyone and deeply touched the islanders. After his death, the islanders' love and respect for him led to a wave of conversion, and in 1843, all of the islanders became Catho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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