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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나의 가톨릭 이야기/[천주교] 가톨릭의 수호성인

[천주교 세례명(catholic baptismal name)] 신학생과 교리교사의 수호성인 성 가롤로 보로메오(Saint Charles Borromeo)

by 1살 비오 2023.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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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들으시면서 읽는 것을 추천드리겠습니다^^↑

 

성인명(saint name) 성 가롤로 보로메오(Saint Charles Borromeo)
축일(Feast) 11월 4일(4 November)
성인 구분(Saint Type) 성인(Saint)
시복(Beatified) 1602년 5월 12일(12 May 1602)
시성(Canonized) 1610년 11월 1일(1 November 1610)
수호(Patronage) 신학생(seminarians), 교리교사(catechists)
신분(Identity) 추기경(cardinal)
활동지역(activity area) 밀라노(Milano)
활동연도(activity year) 1538-1584년

 

성 가롤로 보로메오(Saint Charles Borromeo)는 1538년 10월 2일 이탈리아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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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 Charles Borromeo was born as the second son in Italy on October 2, 1538.

 

어릴 때부터 교회에 봉사하고자 하는 열망이 커서 12살 때 산 그라티니아노(San Gratiniano) 수도원에서 삭발례(tonsure)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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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a young age, he had a great desire to serve the church, and at the age of 12 he was ordained at the Monastery of San Gratiniano.

 

1559년 12월 25일, 그의 외삼촌이 비오 4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직을 계승하게 되었고 비오 4세는 평소 눈여겨본 조카인 성 가롤로 보로메오(Saint Charles Borromeo)를 로마로 불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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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December 25, 1559, his maternal uncle succeeded to the papacy under the name of Pius IV, and Pius IV summoned his nephew, whom he had always admired, Saint Charles Borromeo, to Rome.

 

1560년 22살의 젊은 나이에 파격적으로 추기경으로 임명된 그가 가장 투철한 사명감으로 일했던 분야는 교황청 국무성 장관(Vatican Secretary of State)으로서의 직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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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ointed cardinal in 1560 at the young age of 22, the field in which he worked with the greatest sense of duty was his duties as Vatican Secretary of State.

 

특히 그는 그의 외삼촌인 비오 4세에게 가장 열성적이고 믿음직한 협력자이자 지원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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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particular, he was the most enthusiastic and reliable collaborator and supporter of his maternal uncle, Pius IV.

 

그는 ‘로마 교리서(Roman Catechism)’로 알려진 “본당 신부들을 위한 로마 교리서”(Catechismus romanus ad parochos)의 편찬에 깊이 관여하는 한편, 로마 신학교의 혁신, 미사 경본과 성무일도 및 교회 음악의 개정과 개혁, 교부(Church Fathers)들의 저서 출판 등에 헌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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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was deeply involved in the compilation of the “Roman Catechism for Parish Priests” (Catechismus romanus ad parochos), also known as the Roman Catechism and Innovations in the Roman Seminary, Missal, Liturgy of the Hours, revision of church music He devoted himself to publishing the works of the Church Fathers.

 

1565년 10월 밀라노 교구장(local ordinary)으로 부임한 그는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도 높은 개혁을 단행하여 밀라노 교구를 모범적인 주교좌(cathedra)로 만드는 놀라운 성과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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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ointed as local ordinary of Milan in October 1565, he carried out intensive reforms despite strong opposition and achieved remarkable results in turning the diocese of Milan into an exemplary cathedra.

 

 

 

그는 또한 개혁과 쇄신 운동의 하나로 성직자와 평신도의 윤리와 생활 태도 개선을 위해 유익한 기준을 마련했으며, 성직자 교육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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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also established useful standards to improve the ethics and lifestyle of clergy and laity as part of his reform and renewal movement, and established a seminary for clergy education.

 

1576년 페스트와 기근으로 밀라노 인근의 주민들이 큰 곤경에 빠졌을 때, 그는 한 달 동안 매일 3천여 명의 주민들에게 음식을 제공하여 어려운 난국을 극복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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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1576, when the residents near Milan were in great trouble due to the Black Death and famine, he contributed greatly to overcoming the difficult situation by providing food to about 3,000 residents every day for a month.

 

그는 1584년 10월 그가 즐겨 찾던 바랄로(Varallo)에서 피정과 휴식을 마치고 심한 고열을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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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October 1584, after a retreat and rest in Varallo, his favorite place, he suffered from a severe fever.

 

밀라노로 돌아온 그는 11월 3일 밤에 “주님, 제가 여기 대령했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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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 returning to Milan, he died on the night of November 3rd with his last words, “Lord, I am here.”

 

비록 그는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항상 겸손하게 처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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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though he was in a position of power, he always behaved humbly.

 

그는 자신의 성직자나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들에게 권력을 남용한 적이 없다는 평을 들었으며 개혁의 반대자들로부터도 칭송을 받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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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was said to have never abused his power over his clergy, monks, or laity, and was even praised by opponents of ref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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