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천주교] 나의 가톨릭 이야기/[천주교] 가톨릭의 수호성인

[천주교 세례명(catholic baptismal name)] 성 아우구스티노 수녀회의 설립자 성 베드로 푸리에(Saint Peter Fourier)

by 1살 비오 2023. 11. 11.
반응형

↑노래 들으시면서 읽는 것을 추천드리겠습니다^^↑

 

성인명(saint name) 성 베드로 푸리에(Saint Peter Fourier)
축일(Feast) 12월 9일(9 December)
성인 구분(Saint Type) 성인(Saint)
시복(Beatified) 1730년
시성(Canonized) 1897년
수호(Patronage)  
신분(Identity) 신부(priest), 설립자(founder)
활동지역(activity area)  
활동연도(activity year) 1565-1640년

 

 

성 베드로 푸리에(Saint Peter Fourier)는 1565년 11월 30일 신성로마제국에서 가톨릭 신자이자 상인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더보기

Saint Peter Fourier was born in the Holy Roman Empire on November 30, 1565, as the eldest son of a father and mother who were Catholics and merchants.

 

어려서부터 기도하기를 좋아하던 그는 부모에 의해 15세가 되던 해에 예수회(Society of Jesus) 대학으로 유학 가게 되었다.
더보기

He loved to pray from a young age, and his parents sent him abroad to study at the Society of Jesus University when he was 15 years old.

 

그는 대학 교육을 통해 학업과 신심에 있어서 큰 진보를 이루었고 스무 살 무렵 예수회(Society of Jesus)에 입회하리라는 주변의 예상과는 달리 성 아우구스티누스회(Saint Augustinians)에 입회하였다.
더보기

He made great progress in his studies and devotion through his college education, and at the age of 20, contrary to the expectations of those around him, that he would join the Society of Jesus, he joined the Society of Saint Augustinians.

 

그는 사제로서 부족하다는 생각에 첫 미사 집전을 미루었다. 그리고 속죄와 참회, 기도와 고행으로 몇 달을 보낸 뒤 비로소 첫 미사를 주례하였다. 그는 이처럼 하느님 앞에 늘 겸손한 사제였다.
더보기

He postponed celebrating his first Mass because he felt inadequate as a priest. And after spending several months in atonement, repentance, prayer, and penance, he celebrated his first mass. He was a priest who was always humble before God. 

 

그의 높은 학식과 훌륭한 인품을 알아 본 주교들은 그에게 서로 자신의 교구 본당으로 와달라고 부탁하였다. 하지만 그는 미신에 빠져 하느님을 멀리하는 이들이 많았던 본당을 스스로 자진해서 맡았다.
더보기

Bishops who recognized his high level of learning and great personality asked him to come to their parishes. However, he volunteered to take charge of a parish where there were many people who were superstitious and stayed away from God. 

 

 

그는 매일 가정방문을 하며 신자들이 다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끌었다. 또 엄격한 생활로 신자들에게 모범을 보이며 공과 사를 명확히 구분해 신자들이 개인적으로 초대하는 자리에는 절대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더보기

He visited homes every day and led believers to lead a proper religious life again. He also set an example for believers by living a strict life, clearly distinguishing between public and private matters, and never attended events personally invited by believers. 

 

그리고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감동을 전하는 강론으로 신자들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의 노력으로 사라질 위기해 처했던 본당은 지역에서 가장 모범적인 본당으로 거듭났다.
더보기

And he captured the hearts of believers with an easy-to-understand yet moving sermon. Through his efforts, the parish that was on the verge of extinction was reborn as the most exemplary parish in the region. 

 

 

그는 또 가난하고 소외된 신자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내놓았다. 특히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애정을 쏟으며 이들이 교육받을 수 있도록 힘썼다.
더보기

He also gave everything he had for poor and marginalized believers. He especially devoted his affection to poor children and worked hard to help them receive an education. 

 

교육활동에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함께 노트르담성 아우구스티노 수녀회(the Congregation of Notre Dame of Canonesses Regular of St. Augustine)도 설립했다.
더보기

Together with those who shared their interest in educational activities, she also established the Congregation of Notre Dame of Canonesses Regular of St. Augustine.

 

그는 1639년 그 지역에 페스트가 발병한 후에도 환자들을 돌보는 데 힘쓰다가 그 또한 감염되어 이듬해 12월 9일 선종하였다.
더보기

Even after the plague broke out in the area in 1639, he worked hard to care for patients, but he also became infected and died on December 9 of the following year.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