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천주교] 나의 가톨릭 이야기/[천주교] 가톨릭의 수호성인

[천주교 세례명(catholic baptismal name)] 제노바의 성녀 비르지니아 첸투리오네 브라첼리(Saint Virginia Centurione Bracelli)

by 1살 비오 2023. 11. 15.
반응형

↑노래 들으시면서 읽는 것을 추천드리겠습니다^^↑

 

성인명(saint name) 성녀 비르지니아 첸투리오네 브라첼리(Saint Virginia Centurione Bracelli)
축일(Feast) 12월 15일(15 December)
성인 구분(Saint Type) 성녀(Saintess)
시복(Beatified) 1985년 9월 22일(22 September 1985)
시성(Canonized) 2003년 5월 18일(18 May 2003)
수호(Patronage)  
신분(Identity) 과부(widow), 설립자(founder), 수녀(nun)
활동지역(activity area) 제노바(Genova)
활동연도(activity year) 1587-1651년

 

성녀 비르지니아 첸투리오네 브라첼리(Saint Virginia Centurione Bracelli)는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귀족 가문의 딸로 태어났다.
더보기

Saint Virginia Centurione Bracelli was born in Genoa, Italy, as the daughter of a noble family.

 

태어난 지 이틀 만에 세례성사를 받은 그녀는 어머니와 가정교사로부터 신앙과 문학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봉쇄 수도생활에 대한 성소를 느꼈지만 아버지의 강력한 권유에 의해 결혼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더보기

She received the sacrament of baptism two days after birth and received education in faith and literature from her mother and tutor. Although she felt a vocation to the cloistered monastic life, she married at her father's strong urging. But her marriage did not last long. 

 

그녀의 남편은 저명하고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지만 도박에 깊이 빠져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인내하며 기도와 애정을 갖고 남편을 겸손하고 정상적인 생활로 이끌려고 노력했지만 그녀의 남편은 두 딸의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쾌락에 빠진 생활을 포기하지 않아 결국 짧은 생애를 마감하게 되었다.
더보기

Her husband was from a prominent and wealthy family, but he was deeply addicted to gambling and led a debauched life. She persevered until the end and tried to lead her husband to a humble and normal life with prayer and affection, but despite being the father of two daughters, her husband did not give up his life of pleasure and ultimately ended his short life. 

 

20살의 나이에 남편을 잃고 홀로 된 그녀는 평생 정결을 지키며 살겠다며 아버지가 제안한 재혼의 기회를 거절했다. 그녀는 시댁에 머물며 자녀들을 교육하고 재산을 관리하며 기도와 자선 활동에 전념하였다.
더보기

Left alone after losing her husband at the age of 20, she refused the opportunity to remarry offered by her father, saying she would remain chaste for the rest of her life. She stayed with her in-laws, educated her children, managed her property, and devoted herself to prayer and charity. 

 

1610년 가난한 이들 안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특별한 소명을 느낀 그녀는 가난한 이들에게 헌신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는 재산의 반을 가지고 개인적 또는 자선기관을 이용해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더보기

In 1610, feeling a special calling to serve God among the poor, she began a life of devotion to the poor. She used half of her wealth to help the poor, either privately or through charitable institutions. 

 

두 딸이 결혼하여 안정된 생활을 하자 그녀는 버려진 아이들과 노인들 그리고 병든 이들을 위해 헌신하며 소외된 이들의 생활을 개선하는데 노력하였다.
더보기

When her two daughters got married and established a stable life, she devoted herself to helping abandoned children, the elderly, and the sick, and worked to improve the lives of the underprivileged.

 

1624년 가을부터 이듬해까지 전쟁으로 직업을 잃고 굶주리는 이들이 증가하였다.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한 이들의 자비로운 보호자인 100명의 부인회(One Hundred Lords of Mercy, Protectors of the Poor of Jesus Christ)’를 설립하였다. 
더보기

From the fall of 1624 to the following year, the number of people losing their jobs and starving due to war increased. To overcome this situation, the ‘One Hundred Lords of Mercy, Protectors of the Poor of Jesus Christ’ was established.  

 

629년에서 1630년 사이에 악성 전염병이 유행하고 기근이 들자 그녀는 비어있는 수도원을 빌려 병으로 아프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수용하였다.
더보기

Between 629 and 1630, when there was a plague and famine, she rented empty monasteries and housed the sick and those in financial difficulties.

 

그러나 수도원의 임차료가 너무 비쌌기 때문에 두 채의 주택을 구입하여 우리의 피난처 되시는 성모 마리아(Our Lady of Refuge)께 봉헌하였다.
더보기

However, because the rent at the monastery was too expensive, he purchased two houses and dedicated them to Our Lady of Refuge.

 

그리고 그녀는 두 개의 수도회를 창설하였는데 하나는 하나는 성모님의 자매 수도회(Sisters of Our Lady of Refuge on Mount Calvary)이고 다른 하나는 성모님의 딸들 수도회(Daughters of Our Lady on Mount Calvary)였다.
더보기

And she founded two religious orders, one called the Sisters of Our Lady of Refuge on Mount Calvary and the other called the Daughters of Our Lady on Mount Calvary.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을 계속하여 돌보았을 뿐만 아니라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정치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은 세력들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더보기

Not only did she continue to care for the poor, but she also tried to reconcile politically estranged factions to bring about peace.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모든 시간을 사회적 신분과 관계없이 도움을 청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한 그녀는 1651년 12월 15일 64세의 나이로 제노바에서 선종하였다.
더보기

She, who devoted all her time until the last moment of her life to helping all people who asked for help, regardless of social status, died in Genoa on December 15, 1651, at the age of 64.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그녀를 시성하면서 하신 말씀(What Pope John Paul II said when canonizing her)

사도 요한이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라고 간곡히 권고하신 말씀에 응답하여 비르지니아 성녀는 그 말씀 그대로 사랑을 ‘말이나 혀로’ 하지 않고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실천하려고 했습니다. 지체 높은 가문의 여성임에도, 그녀는 뛰어난 사도적 열성으로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였습니다. 성녀 비르지니아의 사도직 활동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뜻에 아무 토를 달지 않고 무조건 순명한 것에 기인하며, 그녀의 이러한 자세는 주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하면서 순종적인 태도로 귀 기울여 경청한 것에서 길러졌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형제자매들에게 자신의 목숨을 내어 줄 준비를 한 성녀 비르지니아 첸투리오네 브라첼리는 단순하면서도 행동으로 실천하는 성인의 모범을 교회에 남겨주었습니다. 비르지니아가 보여준 복음에 대한 용기 있는 충실한 모습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오늘날에도 여전히 큰 영향력을 미칠 것입니다. 성녀는 이러한 말을 즐겨 하곤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든 사람의 유일한 목표가 되셨을 때, 모든 불화는 사라지고 모든 어려움은 극복될 것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