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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나의 가톨릭 이야기/[천주교] 가톨릭의 수호성인

[천주교 세례명] 영국의 순교자 복자 토마스 레이놀즈(Blessed Thomas Reynolds)

by 1살 비오 2024.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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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들으시면서 읽는 것을 추천드리겠습니다^^↑

 

성인명(saint name) 복자 토마스 레이놀즈(Blessed Thomas Reynolds)
축일(Feast) 5월 4일(4 May)
성인 구분(Saint Type) 복자(Blessed)
시복(Beatified) 1929년 12월 15일(15 December 1929)
시성(Canonized)  
수호(Patronage)  
신분(Identity) 신부(Priest), 순교자(Martyr)
활동지역(activity area) 영국(UK)
활동연도(activity year) +1642년

 

 

복자 토마스 레이놀즈(Blessed Thomas Reynolds)1562년경 영국 옥스퍼드셔(Oxfordshire)에서 태어났다고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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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essed Thomas Reynolds is believed to have been born around 1562 in Oxfordshire, England. 

 

그의 본래 이름은 토마스 그린(Green)이나 당시 박해 중의 많은 가톨릭 사제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 역시 레이놀즈(Reynolds)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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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 original name was Thomas Green, but like many Catholic priests during the persecution at the time, he used the pseudonym Reynolds. 

 

그는 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1592년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영국 선교를 위해 고국으로 돌아와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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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completed his studies at university and was ordained a priest in 1592. He returned to his home country to work as a missionary in England. 

 

하지만 그는 1605년 화약 음모 사건’(Gunpowder Plot)이 발생한 후 반가톨릭적 분위기가 높아진 1606년에 체포되었다. 그는 그런 상황 속에서 다행히 처형을 면하고 추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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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ever, he was arrested in 1606 when anti-Catholic sentiment increased after the Gunpowder Plot of 1605. Fortunately, under such circumstances, he escaped execution and was exiled. 

 

하지만 그는 곧 영국으로 돌아와 1628년 다시 체포될 때까지 약 20년 동안 비밀리에 신자들을 사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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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ever, he soon returned to England and secretly ministered to believers for about 20 years until he was arrested again in 1628. 

 

그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프랑스의 공주 출신으로 가톨릭을 옹호하던 헨리에타 마리아(Henrietta Maria) 왕비의 명령으로 집행이 유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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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was sentenced to death at trial, but the execution was suspended on the orders of Queen Henrietta Maria, a former French princess who advocated Catholicism. 

 

그는 비록 감옥에 갇혔지만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그를 방문해 그를 돌볼 뿐만 아니라 영적 상담과 성사를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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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though he was imprisoned, many Catholics were able to visit him and not only care for him but also receive spiritual counseling and the sacraments. 

 

1635년 그는 다른 여러 사제와 함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 런던 지역의 가톨릭 신자들을 정기적으로 사목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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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1635 he, along with several other priests, was released on bail and permitted to minister regularly to Catholics in the London area. 

 

1640년 재정적 압박에 시달린 찰스 1세(Charles I) 왕은 의회와의 협력이 필요해졌는데 당시 의회에는 가톨릭에 대해 적대적인 청교도들이 많은 의석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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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1640, King Charles I, under financial pressure, needed cooperation with Parliament, where Puritans, who were hostile to Catholicism, had a large number of seats. 

 

그 결과 가톨릭 신자들과 사제들은 다시금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사제들에 대한 재판과 사형 선고도 재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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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a result, Catholics and priests again became targets of oppression, and trials and death sentences for priests resumed. 

 

결국 그는 1642년 1월 21일 아침에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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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ally, on the morning of January 21, 1642, he was taken to Tyburn, London, hanged and executed as a marty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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