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들으시면서 읽는 것을 추천드리겠습니다^^↑
성인명(saint name) |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Saint Francis de Sales) |
축일(Feast) | 1월 24일(24 January) |
성인 구분(Saint Type) | 성인(Saint) |
시복(Beatified) | 1661년 1월 8일(8 January 1661) |
시성(Canonized) | 1665년 4월 8일(8 April 1665) |
수호(Patronage) | 청각 장애인(deaf people), 고해성사자(confessors), 교육자(educators), 작가(writers), 언론인(journalists) |
신분(Identity) | 주교(Bishop), 설립자(Founder), 교회학자(Doctor of the Church) |
활동지역(activity area) | 제네바(Geneva) |
활동연도(activity year) | 1567-1622년 |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Saint Francis de Sales)는 1567년 8월 21일 프랑스 사부아(Savoie)에서 태어났다.
Saint Francis de Sales was born on August 21, 1567 in Savoie, France.
그는 가톨릭 귀족인 부모의 영향을 받아 신앙심 깊은 아이로 성장했다.
He grew up as a deeply religious child under the influence of his Catholic aristocratic parents.
행정관이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과는 달리 19살 때 그는 기적의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던 중 유혹에서 벗어나며 정결을 지키고 성모님께 자신을 봉헌하겠다고 서약했다.
Contrary to his father's wish to become a magistrate, at the age of 19, while praying in front of the miraculous statue of the Virgin Mary, he escaped temptation and pledged to remain chaste and consecrate himself to the Virgin Mary.
1588년부터 그는 이탈리아 파도바(Padova) 대학교에서 교회법과 일반 시민법을 전공하여 1592년 불과 24살의 젊은 나이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From 1588, he studied church law and general civil law at the University of Padova, Italy, and earned a doctorate in 1592 at the young age of only 24.
당시 그의 총명함으로 인해 법률가 자격은 물론 의원 자리까지 제안받았다. 그의 아버지 또한 그가 가문을 빛낼 것으로 기대하며 부유한 귀족 가문과 결혼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Due to his intelligence at the time, he was offered not only legal qualifications but also a position as a member of the National Assembly. His father was also preparing to have him marry into a wealthy noble family, hoping that he would bring glory to the family.
그러나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로마로 성지순례를 떠났는데, 로레토(Loreto) 성모 성지에서 탈혼(ecstasy)과 신비 체험을 하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되었다.
However, before returning to his hometown, he went on a pilgrimage to Rome and responded to God's call by experiencing ecstasy and mysticism at the Shrine of the Virgin of Loreto.
그는 가족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세속의 일과 전망을 모두 포기하고 성직자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Despite his family's extreme opposition, he declared that he would give up all glamorous worldly work and prospects and become a priest.
그리고 어렵게 제네바 성당의 사제로 있던 사촌 형의 도움으로 1593년 12월 18일 사제품을 받을 수 있었다.
And with the help of his cousin, who was a priest at the Geneva Cathedral, he was able to be ordained a priest on December 18, 1593.
그 후 그는 1594년에 선교사를 자원하여 5년 동안 활동했는데 그곳은 칼뱅주의자들이 약 50년간 가톨릭 신앙을 금지하고 프로테스탄트를 강요하던 지역이었다.
Afterwards, he volunteered as a missionary in 1594 and worked for five years in an area where Calvinists had banned Catholicism and forced Protestantism for about 50 years.
그는 냉대와 박해 속에서도 선교를 포기하지 않았다. 끊임없는 암살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곳 주민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끊임없이 외치고 또 일일이 편지를 써서 대문 밑으로 밀어 넣으며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전했다.
He did not give up on missionary work even in the face of cold treatment and persecution. Despite constant assassination attempts, he continued to call for the local residents to convert to Catholicism and conveyed his earnest feelings by writing letters one by one and slipping them under the gate.
그의 부단한 노력으로 많은 이들이 가톨릭교회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그는 1602년 제네바 교구장이 선종하자 그를 계승해 교구장 주교로 착좌하였다.
Through his ceaseless efforts, many people returned to the embrace of the Catholic Church. When the Bishop of Geneva died in 1602, he succeeded him as the Bishop of the Diocese.
교구장이 된 그는 가장 먼저 젊은이와 노인을 포함한 신자들에게 교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일을 시도했다. 그의 선함과 인내, 온유함은 곧 널리 알려졌고, 겸손과 소박한 생활을 통해 가난한 이들과 나눔을 실천했다.
As head of the diocese, he first attempted to systematically teach doctrine to believers, including young and old. His goodness, patience, and gentleness soon became widely known, and he practiced sharing with the poor through humility and simple living.
가톨릭교회가 큰 위기를 맞았던 종교개혁 시기, 프로테스탄트의 세력과 반대가 가장 심했던 제네바의 교구장으로서 그는 특유의 열정과 온유함으로 7만여 명의 개신교도들을 가톨릭교회로 돌아오도록 인도하였다.
During the Reformation, when the Catholic Church faced a major crisis, as the diocese of Geneva, where Protestant power and opposition were the most severe, he led about 70,000 Protestants to return to the Catholic Church with his unique passion and gentleness.
그의 수많은 서간과 저서를 남겼는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신심 생활 입문”과 “신애론”(1616년)을 들 수 있다.
He left behind numerous letters and writings, the most famous of which are “Introduction to the Devout Life” and “Treatise on the Love of God”.
그 이전까지 영성은 주로 수도자들이 추구하는 완덕의 삶으로 제한되는 경향이 컸는데, 세상에서 자기 직업을 갖고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평신도도 세속에서 경건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놀라운 가르침이었다.
Until then, spirituality tended to be limited to the life of perfection pursued by monks, but his surprising teaching was that laypeople who had their own jobs and lived with their families could also lead a godly life in the world.
1622년 12월 27일 뇌일혈이 발생해 급하게 병자성사와 고해성사를 받았다. ‘현대 영성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그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예수, 내 하느님 나의 전부여!”라고 기도한 후 다음날인 12월 28일 숨을 거두었다.
On December 27, 1622, a cerebral hemorrhage occurred and he urgently received the Anointing of the Sick and the Sacraments of Confession. Known as the ‘father of modern spirituality,’ he said, “God’s will be done!” After praying, “Jesus, my God, my everything!”, he died the next day, December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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