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천주교] 나의 가톨릭 이야기/[천주교] 가톨릭의 수호성인

[천주교 세례명] “소녀들의 교육 사도” 성 요안나 드 레토낙(Saint Jeanne de Lestonnac)

by 1살 비오 2024. 1. 23.
반응형

↑노래 들으시면서 읽는 것을 추천드리겠습니다^^↑

 

성인명(saint name) 성 요안나 드 레토낙(Saint Jeanne de Lestonnac)
축일(Feast) 2월 2일(2 February)
성인 구분(Saint Type) 성녀(Saintess)
시복(Beatified) 1900년
시성(Canonized) 1949년 5월 15일(May 15, 1949)
수호(Patronage) 학대 피해자(abuse victims), 과부(Widows)
신분(Identity) 과부(Widow), 설립자(Founder)
활동지역(activity area)  
활동연도(activity year) 1556-1640년

 

 

성 요안나 드 레토낙(Saint Jeanne de Lestonnac)는 프랑스에서 저명한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더보기

Saint Jeanne de Lestonnac was born in France as the daughter of a prominent family. 

 

그녀가 살았던 프랑스는 국가의 분열뿐만 아니라 가족 간의 분열을 가져온 종교전쟁으로 인해 혼란스러웠다.
더보기

France, where she lived, was in turmoil due to religious wars that not only divided the country but also divided families. 

 

그녀의 어머니는 칼뱅주의(Calvinism)에 빠져 그 누구의 권고도 듣지 않았다. 다행히도 그녀는 아버지와 삼촌 덕분에 자기 종교로 이끌고자 했던 어머니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더보기

Her mother was obsessed with Calvinism and did not listen to anyone's advice. Fortunately, thanks to her father and uncle, she was able to escape from the hands of her mother who tried to lead her to her own religion. 

 

그녀는 17살에 결혼하여 여덟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던 그녀는 1597년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41살에 과부가 되었고 네 아이도 어려서 잃었다. 
더보기

She married at 17 and had eight children. However, she had a happily married life, but due to her husband's sudden death in 1597, she became a widow at the age of 41 and lost her four children at a young age. 

 

그녀는 나머지 네 자녀가 모두 자라서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돌보았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꿈꾸어 온 수도생활을 하기 위해 시토회(Cistercians)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더보기

She took care of the remaining four children until they all grew up and became independent. She entered a Cistercian monastery to pursue the monastic life she had dreamed of since childhood. 

 

그러나 수도원의 엄격한 생활은 그녀의 건강을 해쳤고 그녀는 서원을 하기도 전에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더보기

However, the strictness of the monastic life took a toll on her health, and she had to return home before she could make her vows.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한 그녀는 젊은 소녀들을 모아 극심한 역병이 발생했을 때 용감하게 시민들을 간호하였다. 
더보기

After miraculously recovering her health, she gathered young girls and bravely nursed the citizens during a severe epidemic. 

 

당시 특히 여자 아이들의 교육이 큰 문제였는데 소녀들은 가톨릭적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녀는 이를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였다. 
더보기

At the time, education, especially for girls, was a big problem, as girls were not receiving Catholic education. In this respect, she accepted this as God's providence. 

 

1606년 3월 6일 그녀는 특별히 여자 아이들의 교육을 직접적인 사도직으로 하는 마리아회(Sisters of the Company of Mary, Our Lady)를 설립하였다. 
더보기

On March 6, 1606, she founded the Sisters of the Company of Mary, Our Lady, whose apostolate was specifically the education of girls. 

 

그녀는 수도회의 사도직을 실현하기 위해 학교를 설립하여 소녀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한때 그녀는 다른 수녀들의 음모에 휘말려 희생될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모진 시련을 인내로써 극복하였다. 
더보기

In order to fulfill the apostolate of the monastery, she founded a school and devoted herself to the education of girls. At one point, she was caught up in a conspiracy by other nuns and was in danger of being sacrificed, but she overcame the harsh ordeal with patience. 

 

그녀는 1640년 2월 2일 96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