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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나의 가톨릭 이야기/[천주교] 가톨릭의 수호성인

[천주교 세례명] “교사와 작가의 수호성인” 성 미카엘 페브레스 코르데로(Saint Miguel Febres Cordero)

by 1살 비오 2024.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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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들으시면서 읽는 것을 추천드리겠습니다^^↑

 

성인명(saint name) 성 미카엘 페브레스 코르데로(Saint Miguel Febres Cordero)
축일(Feast) 2월 9일(9 February)
성인 구분(Saint Type) 성인(Saint)
시복(Beatified) 1977년 10월 30일(30 October 1977)
시성(Canonized) 1984년 10월 21일(21 October 1984)
수호(Patronage) 교사(Teachers), 작가(Writers)
신분(Identity) 교육자(educator)
활동지역(activity area) 에콰도르(Ecuador)
활동연도(activity year) 1854-1910년

 

 

성 미카엘 페브레스 코르데로(Saint Miguel Febres Cordero)는 1854년 11월 7일 에콰도르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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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 Miguel Febres Cordero was born in Ecuador on November 7, 1854. 

 

그의 아버지는 매력 있는 교양인이자 5개 국어에 능통했고 그의 어머니는 신심이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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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 father was an attractive cultured man and fluent in five languages, and his mother was deeply religious. 

 

그의 어머니는 19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에서 5명이 수녀가 되고 1명은 예수회(Jesuits) 사제가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학자 성인의 탄생을 위해 완벽한 가족을 만들어 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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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 mother had 19 children, of whom five became nuns and one became a Jesuit priest. God created a perfect family for the birth of a scholar saint. 

 

9살 때 그는 그리스도 학교 형제회(Brothers of the Christian Schools)의 첫 학생이 되었다. 그는 학교에서 접하게 된 지성의 생활과 수도회의 겸손한 생활양식을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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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 the age of nine he became the first student of the Brothers of the Christian Schools. He loved the intellectual life he encountered at school and the humble lifestyle of the monastery. 

 

수도생활에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부모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그는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몇 달 지나지 않아 심하게 앓고 집으로 돌아왔다. 결국 어머니는 수도사로서 아들의 성소(Calling)를 인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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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though he was called to a religious life, he did not want to disappoint his parents, so he entered seminary. However, after a few months, he became seriously ill and returned home. In the end, the mother acknowledged her son's vocation as a monk. 

 

1868년 3월 24일 그는 수도회에 입회하면서 미카엘(Miguel)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는 모교에 부임하여 스페인어, 프랑스어, 영어를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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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March 24, 1868, he entered the religious order and received the religious name Michael. He was appointed to his alma mater and taught Spanish, French, and English. 

 

그는 학생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선생님이었으며 그는 자신의 이 소임을 사도적 성소로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마음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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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was a very popular teacher with his students and he saw this ministry as an apostolic vocation. He wrote down his thoughts as follows: 

 

“현대 사회의 가련한 상태에서 나의 거룩한 구세주께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거나, 모든 선에 있어서 나의 절대적 부족함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영혼의 승리에로 나를 부르신다. 내가 그분의 음성에 귀를 막을 수 있을까? 나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에게 실망할까봐 두려워할 수 있을까? 사랑과 감사의 이 모범을 거부할 만큼 대담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맡는 모든 일들을 사랑의 정신으로 맡아야 하며,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의 구원을 위해 나를 채용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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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pitiful state of modern society my Holy Savior does not consider my need for help or my absolute inadequacy in all good things, but calls me to the victory of the soul. Can I turn a deaf ear to His voice? Can I be afraid of disappointing the One who promised to be with me? Would we be bold enough to reject this example of love and gratitude? I must do everything I undertake in a spirit of love and gratitude to God for employing me for his glory and the salvation of souls.”  

 

교육자로서 그의 재능은 대외적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교육과 수도생활 중에 학자로서의 임무를 지속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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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 talents as an educator began to be recognized internationally. And he had the opportunity to continue his mission as a scholar during his education and monastic life. 

 

그는 교과서를 쓰고, 교리교재, 시와 그리스도교 영성 작품을 저술하였다. 그 중 몇 권은 에콰도르의 모든 학교에서 필수 교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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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wrote textbooks, doctrinal materials, poetry, and Christian spiritual works. Some of these books have become required textbooks in all schools in Ecuador. 

 

1907년 3월 그는 프랑스어로 된 더 많은 교과서와 다른 책들을 번역하기 위하여 유럽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병을 앓게 되었고 병이 낫자마자 집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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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arch 1907 he went to Europe to translate more textbooks and other books into French. However, he became ill as soon as he arrived in France, and as soon as he recovered from his illness, he began working at home.  

 

그는 이 때 느낀 마음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내 방이 있고, 책이 있으며, 근처에 성당이 있다. 이것이 완벽한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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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expressed his feelings at this time as follows: “I have my own room, I have books, and there is a cathedral nearby. “This is perfect happiness.” 

 

그는 더 많은 집필을 위해 유럽에 계속 머물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번역작업에 몰두하다가 건강에 무리가 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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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was permitted to remain in Europe for further writing. However, he was so focused on translation work that his health suffered. 

 

1910년 1월 감기에 걸린 그의 몸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었고 결국 1910년 2월 9일 동료 수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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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 physical condition deteriorated rapidly after catching a cold in January 1910, and he eventually passed away on February 9, 1910, with his fellow monks wat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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