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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나의 가톨릭 이야기/[천주교] 가톨릭의 수호성인

[천주교 세례명] 교육자와 학생들의 수호성인 성 요셉 세바스티아노 펠차르(Saint Józef Sebastian Pelczar)

by 1살 비오 2024.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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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들으시면서 읽는 것을 추천드리겠습니다^^↑

 

성인명(saint name) 성 요셉 세바스티아노 펠차르(Saint Józef Sebastian Pelczar)
축일(Feast) 1월 19일(19 January)
성인 구분(Saint Type) 성인(Saint)
시복(Beatified) 1991년 6월 2일(2 June 1991)
시성(Canonized) 2003년 5월 18일(18 May 2003)
수호(Patronage) 교육자(Educators), 학생(Students)
신분(Identity) 주교(Bishop), 설립자(Founder)
활동지역(activity area) 프셰미실(Przemysl)
활동연도(activity year) 1842-1924년

 

성 요셉 세바스티아노 펠차르(Józef Sebastian Pelczar)는 1842년 1월 17일 폴란드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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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 Joseph Sebastian Pelczar was born in Poland on January 17, 1842. 

 

그는 고향에서 전통적으로 신심 깊은 폴란드인 가정의 분위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성장했다. 여전히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데 헌신할 것을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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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spent his childhood growing up in the atmosphere of a traditionally religious Polish family in his hometown. Although still young, he decided to devote himself to serving God. 

 

당시 그는 자신의 일기장에 ‘세속적인 이상들이 사라지며 희생 안에서 삶의 이상을 보았고, 사제직 안에서 그 희생의 이상을 보았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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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 that time, he wrote in his diary, ‘I saw the ideal of life in sacrifice as worldly ideals disappeared, and I saw the ideal of sacrifice in priesthood.’ 

 

1864년 7월 17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프셰미실 교구의 삼보르(Sambor) 본당으로 발령을 받아 1년 반 동안 부주임으로서 사목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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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 being ordained a priest on July 17, 1864, he was assigned to the Sambor parish in the Diocese of Przemyśl and served as a pastor as assistant pastor for a year and a half. 

 

1866년 유학을 위해서 로마(Roma)로 간 그는 신학과 교회법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폴란드로 돌아와 두 군데 본당의 부주임으로 잠시 사목한 후 프셰미실 대신학교의 교수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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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1866, he went to Rome to study, earned a doctorate in theology and canon law, and returned to Poland. After briefly serving as an assistant pastor at two parishes, he worked as a professor at Przemyśl Seminary.  

 

교수이자 신학과의 학과장으로서 그는 현명한 학자이자 유능한 조직가, 젊은이들의 친구라는 명성을 얻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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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a professor and head of the theology department, he gained a reputation as a wise scholar, able organizer, and friend of young people. 

 

대학교 총장으로 16년간 재임하는 동안 그는 여러 도서관을 세우고, 수많은 무료 강연과 천여 권이 넘는 책을 출판 배포했으며, 하인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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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ring his 16 years as university president, he established several libraries, gave numerous free lectures, published and distributed over a thousand books, and established a school for servants. 

 

그는 1894년 크라쿠프에서 예수 성심의 사랑의 왕국을 전파할 목적으로 예수 성심의 시녀회(the Congregation of the Sister Servants of the Most Sacred Heart of Jesus)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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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founded the Congregation of the Sister Servants of the Most Sacred Heart of Jesus in Krakow in 1894 with the purpose of spreading the loving kingdom of the Sacred Heart of Jesus. 

 

그는 이를 통해서 소녀들과 병자,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징표이자 도구가 되기를 원했다. 그는 병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교구의 종교적, 사회적 필요를 위해 쉬지 않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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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wanted it to be a sign and tool of love for girls, the sick, and all people in need. Despite his illness, he worked tirelessly for the religious and social needs of the diocese. 

 

그의 사목적 노력을 통해 많은 수의 성당과 경당이 증가했고, 또한 파괴되거나 폐쇄되었던 많은 성당들이 복구 또는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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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ough his pastoral efforts, the number of cathedrals and chapels increased, and many churches that had been destroyed or closed were restored or rehabilitated. 

 

항상 교구 신자들의 요청에 성실히 응답한 그는 특별히 가장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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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ways faithful to respond to the requests of his parishioners, he especially cared for the poorest. 

 

또한 그는 부당한 대우를 받는 노동자들과 어려운 경제적 상황으로 인해 이민을 갈 수밖에 없는 이들에 대해 깊은 연민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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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also had deep compassion for workers who were treated unfairly and for those who had no choice but to emigrate due to difficult economic circumstances.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데 있어서 많은 장애 요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모든 일을 성실히 수행하다가 1924년 3월 28일 밤, 거룩한 삶의 향기를 풍기며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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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pite the many obstacles in carrying out God's will, he faithfully carried out all of these tasks and died on the night of March 28, 1924, exuding the scent of a holy life. 

 

 

시성식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하신 말씀
(Pope John Paul II's remarks at the canonization ceremony) 


“‘완덕은 요한 묵시록 21장에 나오는 열두 성문을 갖춘 도성과 같습니다. 세상 모든 부분에 활짝 열린 이 열두 성문을 통하여 모든 나라와 영토의 국민 그리고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이 도성 안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 이 완덕의 삶에 이르는 데에는 어떤 조건도 없으며 나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진실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외적인 것에 관심을 두지 않으십니다. … 그분의 관심사는 우리의 영혼입니다. …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내어드릴 수 있는 것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새로 성인이 된 유제프 세바스티안 펠차르 신부는 이 말씀을 통해 하느님께서 거룩함으로 우리 모두를 불러주시는 것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분명하게 표명하였습니다. 그는 사제로, 교수로 그리고 주교로 봉직하면서 이 신념을 펼쳐나갔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거룩함으로 나아가기 위해 자신이 먼저 온 힘을 다해 노력하였고, 다른 사람들도 이 길로 나아가도록 인도해 주었습니다. 그는 여러 분야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지만, 특히 그리스도를 섬기는 데에는 참으로 큰 스승이었습니다.

유제프 세바스티안 펠차르 성인의 평생 좌우명은 ‘모든 것은 참으로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티 없으신 손길을 통해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을 위하여’ 입니다. 이 좌우명이 그의 영성 생활을 오늘의 모습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성인은 성모님을 통해 당신 자신과 자신의 삶 전체에 그리고 자신의 사제직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의탁하였습니다.

특히 유제프 세바스티안 펠차르 성인은 성체성사 안에 내재해 계시며, 성체성사를 통해 드러나신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에 응답하는 것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자신의 신심을 키워 나갔습니다. 성인은 종종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성부께 나아가 영광의 옥좌 위에 앉아 계실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인간들과 함께 생활하셨다는 그 깊은 신비를 우리가 조금이라도 깨닫는다면 우리는 모두 그 경이로움에 놀라 쓰러질 것입니다. 기적 중의 기적인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은 바로 그분의 지극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성인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내면에서 이 놀랍고 위대한 신심이 더욱 자라나도록 끊임없이 격려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신심은 자연스럽게 그를 성모님께로 이끌어주었습니다. 신학의 대가로서 그는 성모님이야말로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의 신비 안에서 성체에 대한 교회의 신심을 미리 체험하신 분’이라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성모님은 사람이 되신 말씀을 태중에 모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모님이야말로 분명히 예수님을 모신 ‘감실’이셨고, 역사상 처음으로 존재한 ‘감실’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유제프 세바스티안 펠차르 성인은 자녀로서 성모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봉헌하였고, 자신의 가정에서 체험한 그 사랑으로 성모님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러한 사랑으로 성모님을 공경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가 설립한 예수 성심 시녀회 수녀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께서 가장 간절히 바라시는 것 가운데 하는 당신의 거룩하신 어머니께서 모든 사람에게 공경을 받고 사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향한 형언할 수 없는 큰 사랑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모든 사람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는 거룩한 십자가로부터 도망치는 사람들까지도 당신의 큰 사랑으로 감싸주시어 그들을 거룩하신 예수 성심께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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