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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나의 가톨릭 이야기/[천주교] 가톨릭의 수호성인

[천주교 세례명] “유럽의 수호성인” 성 치릴로(Saint Cyril)

by 1살 비오 2024.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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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들으시면서 읽는 것을 추천드리겠습니다^^↑

 

성인명(saint name) 성 치릴로(Saint Cyril)
축일(Feast) 2월 14일(14 February)
성인 구분(Saint Type) 성인(Saint)
시복(Beatified)  
시성(Canonized)  
수호(Patronage) 유럽(Europe)
신분(Identity) 대주교(Archbishop), 선교사(Missionary)
활동지역(activity area)  
활동연도(activity year) 826 or 827-869 or 885년

 

 

성 치릴로(Saint Cyril)는 그리스의 테살로니카(Thessalonica)에서 고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무역항이었던 테살로니카에는 슬라브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훌륭한 학교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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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 Cyril was born in Thessalonica, Greece, as the son of a high official. There were many Slavs living in Thessalonica, which was a trading port at the time, and there were many excellent schools. 

 

이런 환경으로 인해 그는 어려서부터 슬라브 민족의 언어와 풍습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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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e to this environment, he was often exposed to the language and customs of the Slavic people from an early age. 

 

그는 14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가서 막강한 권력을 지닌 후견인의 도움으로 왕립 대학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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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 losing his father at the age of 14, he went to Constantinople and entered the Royal College with the help of a powerful guardian. 

 

그곳에서 성 포티우스(Saint Photios the Great)의 문하생으로 공부하다가 슬라브어를 사용하는 지방의 총독직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하고 사제품을 받은 후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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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le studying there as a disciple of Saint Photios the Great, he was offered the position of governor of a Slavic-speaking province, but he declined, was ordained a priest, and taught philosophy at a university.  

 

그 후 그를 도와주던 후견인이 암살되자 비티니아(Bithynia)에 있는 올림푸스 산의 수도원에서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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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 his guardian was assassinated, he began living a secluded life at a monastery on Mount Olympus in Bithynia. 

 

동로마 제국의 황제 미카엘 3세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된 성 포티우스(Saint Photios the Great)가 제자인 성 치릴로(Saint Cyril)에게 러시아의 하자르족(Khazars)에 대한 선교를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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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III, Emperor of the Eastern Roman Empire, and Saint Photios the Great, who became Patriarch of Constantinople, entrusted his disciple Saint Cyril with missionary work to the Khazars in Russia. 

 

그는 형인 성 메토디오(Saint Methodius)와 함께 선교를 위해 출발했고 수많은 개종자를 얻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두 형제는 모라비아(Moravia)의 선교를 위해 파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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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set out on a missionary mission with his older brother, Saint Methodius, and succeeded in gaining numerous converts. Afterwards, the two brothers were sent to Moravia for missionary work. 

 

비록 그들을 개종시키는 일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는 선교를 위해 성경을 고대 슬라브어로 번역하고, 그리스 문자에 기초하여 슬라브 알파벳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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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though he was not very successful in converting them, he translated the Bible into Old Slavonic for his missionary work and created a Slavic alphabet based on the Greek alphabet. 

 

최종 확정된 키릴 문자(Cyrillic script/alphabet)는 아직도 현대 러시아어와 많은 다른 슬라브 언어의 알파벳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그는 형의 도움으로 복음서와 시편 그리고 여러 전례서를 슬라브어로 번역해 전례를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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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inalized Cyrillic script/alphabet is still used as the alphabet for modern Russian and many other Slavic languages. Additionally, with the help of his brother, he translated the Gospel, Psalms, and several liturgical books into Slavic and celebrated the liturgy. 

 

그런데 그들의 이러한 활동은 라틴 교회, 특히 독일 교회 성직자들의 원성을 샀다. 당시 라틴 교회는 전례에서 라틴어 외에 다른 언어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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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ever, their activities drew resentment from clergy of the Latin Church, especially the German Church. At the time, the Latin Church prohibited the use of languages ​​other than Latin in the liturgy. 

 

이를 계기로 교황 성 니콜라우스 1세(Nicolaus I)가 867년에 그들을 로마로 소환했다. 그런데 그들이 로마로 가던 도중 교황이 선종했고, 후임 교황으로 선출된 하드리아누스 2세(Hadrianus II)는 두 형제의 방문에 매우 호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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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prompted Pope Saint Nicholas I to summon them to Rome in 867. However, while they were on their way to Rome, the Pope died, and Hadrianus II, who was elected as the successor, was very favorable to the two brothers' visit. 

 

그들은 교황에게 슬라브어 사용에 대한 자기들의 의견 또한 충분히 설명하였다. 이에 교황은 그들의 뜻을 받아들여 전례에서 슬라브어를 사용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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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y also fully explained to the Pope their opinions on the use of the Slavic language. Accordingly, the Pope accepted their wishes and officially approved the use of Slavic in the liturgy. 

 

그들이 로마에 머무는 동안 성 치릴로(Saint Cyril)는 수도자가 되어 수도원에 머물렀고 그 이름 또한 널리 알려졌으나 건강이 악화하여 모라비아(Moravia)로 돌아가지 못하고 869년 2월 14일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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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le they were staying in Rome, Saint Cyril became a monk and stayed at the monastery, and his name became widely known, but his health deteriorated and he was unable to return to Moravia and died at the monastery on February 14, 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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