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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나의 가톨릭 이야기/[천주교] 가톨릭의 수호성인

[천주교 세례명] “오라토리오회의 설립자” 성 필립보 네리(Saint Philip Neri)

by 1살 비오 2024.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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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들으시면서 읽는 것을 추천드리겠습니다^^↑

 

성인명(saint name) 성 필립보 네리(Saint Philip Neri)
축일(Feast) 5월 26일(26 May)
성인 구분(Saint Type) 성인(Saint)
시복(Beatified) 1615년 5월 11일(11 May 1615)
시성(Canonized) 1622년 3월 12일(12 March 1622)
수호(Patronage) 코미디언(comedians), 예술가(artists), 작가(writers)
신분(Identity) 신부(Priests), 설립자(Founder)
활동지역(activity area)  
활동연도(activity year) 1515-1595년

 

 

성 필립보 네리(Saint Philip Neri)는 1515년 7월 22일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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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 Philip Neri was born in Italy on July 22, 1515. 

 

그는 어려서부터 도미니코회 수도자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18세 때에 그는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어 사업 경력을 쌓으려고 노력했으나 수도 생활에 정진하기로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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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was educated by Dominican monks from an early age. At age 18, he became his uncle's adopted son and attempted to pursue a business career, but decided to devote himself to monastic life. 

 

그리고 철학과 신학을 4년 정도 공부했으나 학업을 포기하고 책을 판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뒤에 길거리나 시장바닥에서 로마인들에게 설교하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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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studied philosophy and theology for about four years, but gave up his studies, distributed the money from book sales to the poor, and began preaching to Romans on the streets and market floors. 

 

그의 모습은 신앙생활에 지극히 미온적이었던 로마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로마의 영성적 삶을 부흥하고자 했던 그는 병원, 은행, 가게, 상점 등을 방문하며 많은 사람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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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 appearance greatly impressed the Romans, who were extremely lukewarm about their religious life. He wanted to revive the spiritual life of Rome and met many people while visiting hospitals, banks, stores, and stores. 

 

1548년 그는 자기의 고해신부와 함께 ‘가장 거룩한 삼위일체회(The Confraternity of the Most Holy Trinity)’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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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1548, he founded ‘The Confraternity of the Most Holy Trinity’ with his confessor. 

 

그는 이 단체를 통해 기도 생활을 널리 전파하고 어려운 처지의 순례자들과 병자들을 돌보며 활발한 봉사활동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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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ough this organization, he spread his prayer life widely and carried out active volunteer work by caring for pilgrims and the sick in difficult situations. 

 

거의 17년을 로마에서 평신도로서 활동한 그는 고해신부의 충고로 사제품을 받을 결심을 뒤늦게 하였다. 특히 젊은이들을 사랑했던 그는 그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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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 working as a layman in Rome for almost 17 years, he delayed his decision to be ordained a priest on the advice of his confessor. He especially loved young people and spent a lot of time with them. 

 

그는 수많은 개종자를 얻는 일뿐만 아니라, 자신을 도와줄 사제들을 확보하는 데에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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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had great success not only in winning large numbers of converts, but also in securing priests to assist him. 

 

그는 수도 생활에 대한 꿈을 실현하고자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사제들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본격적으로 영적 권고와 고해성사 및 청년 사목에 전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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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order to realize his dream of monastic life, he formed a community centered around like-minded priests and devoted himself to spiritual advice, confession, and youth ministry. 

 

그들은 신자들을 오라토리오(Oratorio) 즉 방에 모아놓고 영적 권고와 고해성사를 주었고 이것이 오라토리오회(the Congregation of the Oratory)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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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y gathered believers in an oratorio, or room, and gave spiritual advice and confession, which was the beginning of the Congregation of the Oratory. 

 

그는 뛰어난 영적 지혜와 환시를 통해 부자와 가난한 자, 권력자와 힘없는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도와주었다. 특히 그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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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helped the rich and the poor, the powerful and the powerless through his outstanding spiritual wisdom and vision. In particular, he is said to have had the insight to see through people's hearts. 

 

그는 병상에 누워 주위에 모인 영적 아들들에게 벽에 걸린 십자가를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말한 후 선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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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died after lying on his sick bed, pointing to the cross on the wall to his spiritual sons gathered around him and saying the following: 

 

“주님께서는 고통스럽게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시는데, 나는 편안한 침대에 누워 친절한 사람들의 간호를 받고 있으니 얼마나 염치없는 노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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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shameless it is for me to lie in a comfortable bed and be cared for by kind people while the Lord suffers a painful crucifix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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